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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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는 1930년대에 창단된 푸에르토리코의 야구팀이다. 1939-40 시즌에 푸에르토리코 세미프로 야구 리그에 합류하여,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과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 1950-70년대에는 조지 스케일스, 루벤 고메스, 로베르토 클레멘테, 윌리 메이스 등의 활약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며, 1950-51 시즌 첫 우승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리그 우승과 카리브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대 이후 MLB 선수들의 유입과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기록했으나, 2000년대 초반 팀 매각 및 연고지 이전으로 위기를 겪었다. 2012-2013 시즌에 재창단 이후, 2014-2015 시즌부터 2019-2020 시즌까지 4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백투백"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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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 (야구)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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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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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지 | 산투르세, 산후안, 푸에르토리코 |
창단 | 1939년 |
리그 | 푸에르토리코 베이스볼 리그(1939년–현재) |
홈구장 | 히람 비스론 스타디움 (1962-1982, 1989-2005, 2008–현재) |
구단 정보 | |
구단주 | 임펄스 스포츠 앤 엔터테인먼트, Inc. |
감독 | 알렉스 신트론 |
사장 | 카를로스 이기나 오하리스 |
단장 | (정보 없음) |
색상 | 로열 블루, 흰색, 회색 |
수상 내역 | |
리그 우승 | 16회 (1950-51, 1952-53, 1954-55, 1958-59, 1961-62, 1964-65, 1966-67, 1970-71, 1972-73, 1990-91, 1992-93, 1999-00, 2014-15, 2015-16, 2018-19, 2019-20) |
카리브 시리즈 우승 | 5회 (1951, 1953, 1955, 1993, 2000) |
인터아메리칸 시리즈 우승 | 1회 (1962) |
2. 창단 및 초기 역사 (1939-1940년대)
1930년대에 아마추어 야구 선수이자 푸에르토리코 쉘 석유 지사 임원이었던 페드린 소릴라가 산투르세에 야구팀을 창단했다. 에리베르토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는 선수들이 살았던 콘다도와 로이사 거리의 캉그레호 아리바 및 캉그레호 아바호 지역의 이름을 따서 팀 이름을 캉그레헤로스(Cangrejeros, 게)로 지었다.[2] 소릴라는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라파엘 무니즈, 마이크 파사렐, 엑토르 네바레스, 토뇨 팔레름 등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이끌며 기금 마련과 운영을 감독했고, 판치쿠 토스테는 여러 지역 사업체와 연락하여 팀을 홍보하고 티켓 판매를 관리했다.[2]
캉그레헤로스는 1939-40 시즌에 푸에르토리코 세미프로 야구 리그(LBSPR)에 합류했으며, 첫 홈구장은 에스타디오 델 에스캄브론이었다.[2] 팀 라인업에는 미국에서 조직적인 야구를 한 최초의 푸에르토리코인 아구스틴 다비우와 폰세 출신의 루이스 라울 카브레라가 포함되었다.[3] 흑인 리그 선수 빌리 버드, 조시 깁슨, 딕 시이와 계약했고, 시이는 시즌 초반에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깁슨이 도착한 후 깁슨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고, 시즌이 끝나기 전에 베네수엘라에서 뛰기 위해 팀을 떠났다. 캉그레헤로스는 1939년 10월 1일에 데뷔하여 아과디야와 더블헤더에서 승리를 주고받았다.[3]
초창기 캉그레헤로스는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으며, "시티 챔피언십"으로 불리는 경기를 치렀다. 캉그레헤로스와 세나도레스의 라이벌 관계는 소릴라가 홍보를 위해 만든 용어인 "시티 챔피언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산후안이 이 대결의 첫 번째 배너를 차지했다. 그러나 팀은 11월에 과야마에 23-0으로 패했고, 이는 60년 만에 산투르세 연고 팀의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다.[4] 결과적으로, 캉그레헤로스는 언론으로부터 "소프트볼 팀"이라고 불렸고, 이러한 양상은 초창기에 계속되었다. 캉그레헤로스는 시즌 전반기를 6위로 마쳤고, 후반기에는 아과디야와 공동 4위를 기록했다. 팀은 세나도레스를 두 경기 연속으로 꺾고 시즌을 마무리하여 세나도레스가 페넌트를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경기를 치르도록 했다.[4]
2. 1. 팀 창단과 리그 합류 (1939-1940)
1930년대에 아마추어 야구 선수이자 푸에르토리코 쉘 석유 지사 임원이었던 페드린 소릴라가 산투르세에 야구팀을 창단했다. 에리베르토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는 선수들이 살았던 콘다도와 로이사 거리의 캉그레호 아리바 및 캉그레호 아바호 지역의 이름을 따서 팀 이름을 캉그레헤로스(Cangrejeros, 게)로 지었다.[2] 소릴라는 라미레스 데 아레야노, 라파엘 무니즈, 마이크 파사렐, 엑토르 네바레스, 토뇨 팔레름 등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이끌며 기금 마련과 운영을 감독했고, 판치쿠 토스테는 여러 지역 사업체와 연락하여 팀을 홍보하고 티켓 판매를 관리했다.[2]캉그레헤로스는 1939-40 시즌에 푸에르토리코 세미프로 야구 리그(LBSPR)에 합류했으며, 첫 홈구장은 에스타디오 델 에스캄브론이었다.[2] 팀 라인업에는 미국에서 조직적인 야구를 한 최초의 푸에르토리코인 아구스틴 다비우와 폰세 출신의 루이스 라울 카브레라가 포함되었다.[3] 흑인 리그 선수 빌리 버드, 조시 깁슨, 딕 시이와 계약했고, 시이는 시즌 초반에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깁슨이 도착한 후 깁슨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고, 시즌이 끝나기 전에 베네수엘라에서 뛰기 위해 팀을 떠났다. 캉그레헤로스는 1939년 10월 1일에 데뷔하여 아과디야와 더블헤더에서 승리를 주고받았다.[3]
초창기 캉그레헤로스는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으며, "시티 챔피언십"으로 불리는 경기를 치렀다. 캉그레헤로스와 세나도레스의 라이벌 관계는 소릴라가 홍보를 위해 만든 용어인 "시티 챔피언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산후안이 이 대결의 첫 번째 배너를 차지했다. 그러나 팀은 11월에 과야마에 23-0으로 패했고, 이는 60년 만에 산투르세 연고 팀의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다.[4] 결과적으로, 캉그레헤로스는 언론으로부터 "소프트볼 팀"이라고 불렸고, 이러한 양상은 초창기에 계속되었다. 캉그레헤로스는 시즌 전반기를 6위로 마쳤고, 후반기에는 아과디야와 공동 4위를 기록했다. 팀은 세나도레스를 두 경기 연속으로 꺾고 시즌을 마무리하여 세나도레스가 페넌트를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경기를 치르도록 했다.[4]
2. 2. 초기 선수단 구성과 성장 (1940-1947)
2. 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변화 (1942-1945)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징집되면서 리그는 팀 수를 절반으로 줄였고, 3년 동안 외국인 선수 보강은 없었다.[9] 1942-43 시즌, 카과스가 프랜차이즈를 잃었고, 캉그레헤로스는 루이스 올모, 새미 세스페데스, 마놀로 가르시아를 포함한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다.[9] 캉그레헤로스는 전반기 우승을 차지하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폰세에 패했다.[9] 이 시즌에 올모는 코임브레와 함께 공동 MVP로 선정되었다.[9] 이후 폰세는 2번의 챔피언십을 우승했고, 캉그레헤로스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펠릭스 안드라데와 알폰소 제라드는 산투르세를 위해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고, 테텔로 바르가스는 1943-44 시즌에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다.[10]3. 전성기 (1948-1973)
1950-51 시즌, 조지 스케일스를 감독으로 영입하고 새로운 외국인 선수들을 계약했다. 호세 "페페" 루카스가 "El Pepelucazo"로 알려진 홈런을 치면서 첫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16] 캉그레헤로스는 "시티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이후 모든 준결승 경기에서 세나도레스를 꺾었다. 크리오요스를 7경기 시리즈에서 꺾고 산투르세의 첫 번째 LBPPR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으며, 새로 창설된 카리브 시리즈에 진출했다.[17] 첫 국제 대회에서 캉그레헤로스는 카과스로 돌아온 루이스 올모, 로베르토 바르가스, 호세 산티아고를 비롯한 선수들로 보강하여 푸에르토리코를 위해 첫 카리브 타이틀을 획득했다. 올모는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17]
1951-52 시즌에 산투르세는 16승 4패로 정규 시즌을 마감하며 3위를 기록했다. 준결승에서 카과스를 모든 준결승 경기에서 꺾고, 결승에서 산후안에 패했다.[18] 루벤 고메스는 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1952-53 시즌에 캉그레헤로스는 버스터 클락슨을 선수 겸 감독으로 고용했다. 이 시즌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의 리그 데뷔를 기념했다.[19]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레오네스를 3경기 만에 탈락시켰다. 결승전은 세나도레스와의 경기였고, 산투르세는 6경기 시리즈에서 두 번째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캉그레헤로스는 두 번째 카리브 시리즈 타이틀을 획득하며 최종 5승 1패를 기록했다.[20] 1953-54 시즌에 캉그레헤로스는 순위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클레멘테와 고메스는 견고한 활약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에 조릴라와 오테로는 뉴욕 자이언츠에 허가를 요청했고, MLB 내셔널 리그 MVP 윌리 메이스와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메이스는 중견수로 활약했고, 리그 MVP와 타격왕을 차지했다. 다른 외국인 선수로는 클락슨, 밥 서먼, 조지 크로우가 포함되었다. 시즌 첫 달 이후 팀은 리그 순위 4위였고, 세나도레스와 크리오요스를 상대로 연승을 거두기 전까지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21]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팀은 2명의 선수를 방출하고 3명의 보강 선수를 영입했지만, 겨울 리그에서 같은 팀 소속 5명의 선수 참여를 금지하는 MLB 규칙으로 인해 한 명을 잃었다.[22] 올해 올스타전에서 클레멘테는 2개의 홈런을 쳐 산투르세와 산후안 선수들로 구성된 북부팀이 남부팀을 상대로 승리하도록 했다.[23] 1954년 10월 31일, 고메스는 리그 최초의 완봉승을 거두었고, 13승 4패를 기록했으며 산투르세를 위해 "시티 챔피언십"과 카리브 시리즈 타이틀을 획득했다.[24] 시리즈를 휩쓴 후, 팀은 카리브 시리즈 전에 어떠한 보강도 하지 않았고, 이는 한 팀이 그렇게 한 첫 번째 경우였다.[25] 5명의 선수가 해당 대회의 올스타 라인업에 포함되었고, 돈 짐머가 MVP를 수상했으며, 캉그레헤로스는 3번의 카리브 챔피언십 우승으로 특별 트로피를 받았다. 이 버전의 ''캉그레헤로스''는 현지 신문에 의해 ''El Escuadrón del Pánico''라는 별명을 얻었다. 팀은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고, 라 포르탈레자에 초청되었다.[26]
캉그레헤로스는 1955-56 시즌을 위해 올랜도 세페다, 호세 파간, 후안 피사로를 포함한 7명의 새로운 선수를 영입했다. 그들은 정규 시즌 내내 리그를 이끌었고, 해당 단계의 타이틀을 획득하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27] 세페다는 1955년 10월 30일 레오네스를 상대로 16이닝 패배에서 첫 홈런을 쳤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팀은 팬을 유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몇 년 동안 리그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28] 결승 시리즈에 진출한 다른 팀은 크리오요스였고, 1-2로 뒤진 후 우승을 차지했다.[28] 1956-57 시즌에 조릴라는 팀을 라몬 쿠에바스에게 매각했다.[29] 클레멘테는 피사로 및 로니 샘포드와 함께 카과스로 트레이드되었다.[30] 고메스는 이 시즌에 팀의 유일한 MLB 투수였다. 산투르세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정규 시즌을 마감하기 위해 10연승을 거두었다.[31] 결승 시리즈에서 캉그레헤로스는 마야구에스에게 1-4로 패했다.
1957-58 시즌에 팀은 첫 번째 전반기 부진에서 회복하여 4번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팀은 그 해에 엘 코만단테 경마장 개장으로 인한 경마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일정을 조정해야 했다.[32] 세페다는 리그 타점 1위를 기록했고, 빅토르 펠롯과 홈런에서 동률을 이루었다. 캉그레헤로스는 클레멘테와 피사로가 전 동료들을 압도한 시리즈에서 카과스에 결승에서 패했다.[33] 1958-59 시즌에 조릴라는 팀의 단장으로 복귀했고, 팀은 관중 문제로 인해 경기를 중단했다. 산후안과 산투르세는 시즌 내내 우승을 놓고 경쟁했지만, 결국 세나도레스가 우승을 차지하고 캉그레헤로스는 2위를 차지했다.[34] 팀은 7경기 준결승에서 마야구에스를 꺾었다. 결승에 진출한 다른 팀은 카과스였고, 결승 시리즈에서 2경기 먼저 앞서나갔다. 캉그레헤로스는 고메스, 세페다, 훌리오 나바로의 활약으로 4연승을 거두며 회복했다.[35] 펠롯, 니노 에스칼레라, 루이스 아로요는 카리브 시리즈를 위해 캉그레헤로스를 보강했다. 팀은 승률 0.500으로 3위를 기록했다.[35]
3. 1. 세페다의 등장과 고메스의 활약 (1959-1970)
1959년-1960년 시즌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사업 거래가 종료된 해로, 올랜도 세페다를 좌익수로 기용하고 팀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한 후 레이 머레이 감독은 해고되었다.[36] 올모가 팀의 새로운 감독이 되었고, 피사로를 영입했다.[36] ''푸에르토리코 선수 협회''(Asociación de Jugadores de Puerto Rico)가 결성되었고, 고메스와 산티아고가 캉그레헤로스를 대표했다.[36] 산투르세는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카과스에게 패했다.[37] 캉그레헤로스는 1960-61 시즌 전반기를 꼴찌로 마쳤고, 후반기에는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단기 리그 형식으로 인해 탈락했다.[38] 1961-62 시즌 동안, 히람 비손 스타디움으로 홈구장을 이전했다. 캉그레헤로스는 결승전에서 인디오스를 스윕하며 우승을 차지했다.[39] 세페다는 시즌 동안 1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기록을 깼고, 피사로는 LBPPR에서 5년 연속 삼진 1위를 기록했다.[40] 팀은 인터아메리칸 시리즈에서 우승한 유일한 LBPPR 팀이 되었다.[41] 1962-63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세페다를 잃었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유망주들로 로스터를 강화했다.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크리오요스에게 패했다.[42] 피사로는 인디오스의 인터아메리칸 시리즈 보강 선수로 계약을 맺었고, 이 대회 역사상 유일한 노히터 경기를 펼치며 10개의 삼진을 잡아냈다.[43] 산투르세의 호세 헤이겔은 LBPPR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세페다는 1963-64 시즌에 복귀했고, 호세 타르타불이 합류했다.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에서 4위를 기록했지만, "시티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43]1964-65 시즌, 팀은 마브 스태일리를 영입하여 팀을 강화했다. 세페다는 부상으로 인해 짧은 기간 동안만 경기에 출전했다.[44]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우승을 차지하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결승전에서 인디오스를 상대로 승리했다. 1965년 1월 9일, 마야궤스의 1루수 프레드 홉케는 한 번도 공을 잡지 못하고, 경기 내내 보살이나 1루에서 아웃을 기록하지 못했다.[45] 스태일리는 리그 MVP를 수상했고, 피사로는 팀의 에이스 투수였다. 올모는 1965-66 시즌에 감독으로 복귀했지만, 팀은 시즌 초반에 10연패를 당하며 고전했고, 결국 꼴찌로 시즌을 마쳤다.[46] 1966-67 시즌, 팀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협력 관계를 맺었고, 얼 위버가 감독으로 계약을 맺었다.[47]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에서 2위를 차지, 결승에 진출했다.[48]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 우승팀인 레오네스 데 폰세를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49] 피자로와 고메스를 포함한 투수진은 이 성공에 기여했으며, 전반기 동안 평균 1.93의 방어율을 기록했다.[49] 토니 페레즈는 리그 MVP로 선정되었고, 세페다, 길베르토 토레스, 데이브 메이와 함께 3루수로 출전했다. 1967-68 시즌,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준결승에서 폰스를 탈락시킨 후, 팀은 결승전에서 카과스에게 패했다. 세페다의 공격은 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0] 1968-69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프랭크 로빈슨이 감독을 맡았다. 팀은 역대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정규 시즌 우승을 차지했지만, 준결승에서 세나도레스에게 패했다.[51] 팀의 투수 짐 파머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노히터 경기를 펼쳤다.
1969-70 시즌, 팀은 준결승에 진출하여 인디오스를 꺾었다. 하지만 3년 연속으로, 팀은 폰스를 상대로 시리즈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데 실패했다.[52] 1969년 12월 20일, 팀은 아레시보와 함께 세인트토머스에서 열린 드문 경기에 참여했다.[53]
3. 2. 1970년대의 영광 (1970-1973)
4. 과도기 (1974-1979)
5. MLB 선수 유입과 새로운 전성기 (1980-2000)
1980-81 시즌에 쿠키 로하스가 감독으로 임명되어 이반 데헤수스, 페르난도 곤잘레스, 윌리 에이컨스와 계약했다.[65] 세페다, 고메즈, 피사로는 이제 팀의 코치로 활동했다.[65] 그러나 산투르세는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1년 4월 9일, 조릴라가 사망했고 다음 시즌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열렸다. 고메즈는 1981–82 시즌의 일부를 감독하다가 잭 아커에게 사임했다. 카를로스 레스카노, 에드 피게로아, 기예르모 몬타네스, 제리 모랄레스가 로스터에 합류했다.[66]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폰세에게 패했다.
1982–83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바야몬 시에 위치한 후안 라몬 루브리엘 스타디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67] 피게로아, 페레즈, 루이스 티안트, 레지 패터슨, 호세 알바레즈, 에르난데스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67] 팀은 정규 시즌 페넌트를 획득했다. 아레시보는 준결승에서 캉그레헤로스를 꺾었다.[68]
레이 밀러는 1983–84 시즌에 산투르세의 감독을 맡았다. 팀은 존 셸비와 제리 윌라드와 계약했고, 윌라드는 LBPPR MVP를 수상했다. 산투르세는 3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준결승에서 폰세에게 패했다.[69] 1984–85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샌디 알로마 주니어와 루벤 시에라와 계약하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출전 시간을 얻었다. 프랭크 베르디가 팀의 감독을 맡았다.[70]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카과스를 꺾었다. 산후안 메트로스는 7차전에서 최종 시리즈에서 승리했다.[71] 윌라드는 타격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시에라는 올해의 신인상을 받았다.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산투르세는 3위로 시즌을 마쳤고, 1985–86 시즌에 새로 창설된 라운드 로빈에 진출했다. 팀은 이 단계에서 느린 출발을 보였고, 마야구에스와 산후안이 결승 진출을 확정하면서 탈락했다.[72] 1986–87 시즌, 팀은 다저스와 3년 프로 계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케빈 케네디 감독을 포함한 여러 유망주와 스태프를 지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정규 시즌 5위로 라운드 로빈에 진출하지 못했다.[73]
캉그레헤로스는 1987–88 시즌 페넌트를 획득했다. 알로마, 시에라, 데헤수스는 복귀한 윌라드, 마이크 하틀리, 올랜도 산체스, 빌 크루거, 마이크 페레즈와 합류했다. 라운드 로빈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후 팀은 인디오스와 함께 결승에 진출했다. 팀은 7차전에서 최종 시리즈에서 패했다.[74] 다저스와의 계약 마지막 시즌에 캉그레헤로스는 심각한 공격 부진을 겪으며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알로마 주니어는 이 시즌에 출전하지 않았고 이후 폰세로 떠났다.[75] 에드 로메로와 드와이트 스미스만이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1989–90 시즌은 푸에르토리코의 수도권을 심각하게 강타한 허리케인 휴고로 인해 10경기가 단축되었다.[75] 레이 밀러가 감독으로 영입되었지만, 팀의 경기력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다.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5위로 라운드 로빈에서 탈락했다. 시에라는 이 시즌에 출전하지 않았고, 데헤수스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76]
1990-91 시즌 팀에는 마크 렘케, 주니어 오르티즈, 하이메 나바로, 캔디 시에라, 루이스 아키노 등이 포함되었다. 시즌 후반에 마이크 커베지와 마코 올리베라스가 감독을 맡았다.[77] 여러 부상 선수들로 인해 부진한 출발을 보였으나, 올리베라스 감독 하에서 더 나은 경기력을 보이며 라운드 로빈에 진출했다. 2위로 시즌을 마친 후 팀은 결승에서 마야구에스를 상대로 9전 5선승 시리즈에서 5–3으로 승리했다.[78] 캉그레헤로스는 캐리비안 시리즈에 참가했지만 예선 라운드에서 단 한 번만 승리했다. 다음 시즌, 팀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몇몇 선수들과 스티브 웬델로 전력을 보강했다. 당시 38세였던 데헤수스는 리그에서 은퇴했다.[78]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 4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라운드 로빈에서 4연패를 당하며 진출에 실패했다.[79]
1992–93 시즌, 바야몬이 프랜차이즈를 잃었고 산투르세는 후안 곤잘레스와 프란시스코 올리베라스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새로운 선수인 곤잘레스, 디키 손, 엑토르 비야누에바의 공격력은 시즌 내내 팀을 이끌었다.[79] 팀의 불펜 또한 1.63의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올리베라스, 그레그 해리스, 호세 레브론, 스콧 베일스가 이끌었다. 산투르세는 라운드 로빈에 진출하여 탈락 경기에서 마야구에스를 꺾은 후 2위를 차지했다. 팀은 챔피언십에서 승리하여 산후안을 상대로 5–1로 최종 시리즈에서 승리했다.[80] 캉그레헤로스는 LBPPR의 대부분의 상을 휩쓸었고, 올리베라스는 올해의 감독, 레브론은 올해의 투수, 곤잘레스는 리그 MVP를 수상하며 홈런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81] 산투르세는 40년 만에 첫 캐리비안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투수진과 손의 공격력을 기반으로 했으며, 비야누에바는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82] 1993–94 시즌, 곤잘레스, 시에라, 레오 고메즈가 포함된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 4위를 기록했다. 라운드 로빈을 8–4의 기록으로 마친 후 팀은 최종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산후안에게 5–2로 패했다.[83] 1994–95 시즌을 앞두고 캉그레헤로스는 곤잘레스와 올리베라스에 대한 권리를 바야몬의 전 프랜차이즈를 소유하게 된 카과스에 넘겨주었다. 팀은 시즌 내내 공격 부진을 겪으며 5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러한 경기력으로 인해 트로이 O'레어리, 칼 에버렛, 제럴드 윌리엄스 세 명의 보강 선수가 해고되었고, 외야진 전체가 바뀌었으며 시에라만이 제 몫을 해냈다. 손은 제한적인 출전 후 은퇴했다.[83]
1995–96 시즌, LBPPR은 라운드 로빈을 중단하고 이전 형식으로 돌아갔다. 호세 크루즈가 감독으로 영입되었고, 팀과 휴스턴 애스트로스 간에 느슨한 협약이 맺어지면서 애스트로스에서 몇몇 유망주를 임대했다. 호세 크루즈 주니어는 이 시즌에 데뷔했다. 레이 오르도네즈, 대릴 스트로베리, 멜빈 니에베스, 에두아르도 페레즈, 올랜도 메르세드가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아레시보에게 패했다.[84] 1996–97 시즌 팀에는 맷 갈란테와 유망주 데니스 콜론, 제임스 마운튼, 크리스 홀트, 브라이언 헌터 등 애스트로스 출신 여러 인물들이 포함되었다.[85] 산투르세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산후안에게 모든 경기를 패했다. 이듬해 캉그레헤로스는 진출에 실패했고, 정규 시즌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86] 애스트로스 선수들의 존재가 이미 줄어들던 해에, 시에라는 여전히 탄탄한 공격력을 보여주었고, 스콧 엘라톤은 팀을 위해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86] 1999년 1월, 산후안의 프랜차이즈가 카롤리나로 이전되면서, 10년간의 마지막 "시티 챔피언십"이 개최되었다.[87] 산투르세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마야구에스에게 스윕을 당했다.[88]
5. 1. 1980년대의 변화 (1980-1989)
1980-81 시즌에 쿠키 로하스가 감독으로 임명되어 이반 데헤수스, 페르난도 곤잘레스, 윌리 에이컨스와 계약했다.[65] 세페다, 고메즈, 피사로는 이제 팀의 코치로 활동했다.[65] 그러나 산투르세는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1년 4월 9일, 조릴라가 사망했고 다음 시즌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열렸다. 고메즈는 1981–82 시즌의 일부를 감독하다가 잭 아커에게 사임했다. 카를로스 레스카노, 에드 피게로아, 기예르모 몬타네스, 제리 모랄레스가 로스터에 합류했다.[66]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폰세에게 패했다.1982–83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바야몬 시에 위치한 후안 라몬 루브리엘 스타디움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67] 피게로아, 페레즈, 루이스 티안트, 레지 패터슨, 호세 알바레즈, 에르난데스가 로스터에 이름을 올렸다.[67] 팀은 정규 시즌 페넌트를 획득했다. 아레시보는 준결승에서 캉그레헤로스를 꺾었다.[68]
레이 밀러는 1983–84 시즌에 산투르세의 감독을 맡았다. 팀은 존 셸비와 제리 윌라드와 계약했고, 윌라드는 LBPPR MVP를 수상했다. 산투르세는 3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준결승에서 폰세에게 패했다.[69] 1984–85 시즌, 캉그레헤로스는 샌디 알로마 주니어와 루벤 시에라와 계약하여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출전 시간을 얻었다. 프랭크 베르디가 팀의 감독을 맡았다.[70]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카과스를 꺾었다. 산후안 메트로스는 7차전에서 최종 시리즈에서 승리했다.[71] 윌라드는 타격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 시에라는 올해의 신인상을 받았다.
어린 선수들로 구성된 산투르세는 3위로 시즌을 마쳤고, 1985–86 시즌에 새로 창설된 라운드 로빈에 진출했다. 팀은 이 단계에서 느린 출발을 보였고, 마야구에스와 산후안이 결승 진출을 확정하면서 탈락했다.[72] 1986–87 시즌, 팀은 다저스와 3년 프로 계약을 맺었고, 이를 통해 케빈 케네디 감독을 포함한 여러 유망주와 스태프를 지원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정규 시즌 5위로 라운드 로빈에 진출하지 못했다.[73]
캉그레헤로스는 1987–88 시즌 페넌트를 획득했다. 알로마, 시에라, 데헤수스는 복귀한 윌라드, 마이크 하틀리, 올랜도 산체스, 빌 크루거, 마이크 페레즈와 합류했다. 라운드 로빈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후 팀은 인디오스와 함께 결승에 진출했다. 팀은 7차전에서 최종 시리즈에서 패했다.[74] 다저스와의 계약 마지막 시즌에 캉그레헤로스는 심각한 공격 부진을 겪으며 리그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알로마 주니어는 이 시즌에 출전하지 않았고 이후 폰세로 떠났다.[75] 에드 로메로와 드와이트 스미스만이 올스타전에 선발되었다.
1989–90 시즌은 푸에르토리코의 수도권을 심각하게 강타한 허리케인 휴고로 인해 10경기가 단축되었다.[75] 레이 밀러가 감독으로 영입되었지만, 팀의 경기력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실패했다.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5위로 라운드 로빈에서 탈락했다. 시에라는 이 시즌에 출전하지 않았고, 데헤수스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76]
5. 2. 1990년대의 영광과 좌절 (1990-2000)
1990-91 시즌 팀에는 마크 렘케, 주니어 오르티즈, 하이메 나바로, 캔디 시에라, 루이스 아키노 등이 포함되었다. 시즌 후반에 마이크 커베지와 마코 올리베라스가 감독을 맡았다.[77] 여러 부상 선수들로 인해 부진한 출발을 보였으나, 올리베라스 감독 하에서 더 나은 경기력을 보이며 라운드 로빈에 진출했다. 2위로 시즌을 마친 후 팀은 결승에서 마야구에스를 상대로 9전 5선승 시리즈에서 5–3으로 승리했다.[78] 캉그레헤로스는 캐리비안 시리즈에 참가했지만 예선 라운드에서 단 한 번만 승리했다. 다음 시즌, 팀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몇몇 선수들과 스티브 웬델로 전력을 보강했다. 당시 38세였던 데헤수스는 리그에서 은퇴했다.[78]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 4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라운드 로빈에서 4연패를 당하며 진출에 실패했다.[79]1992–93 시즌, 바야몬이 프랜차이즈를 잃었고 산투르세는 후안 곤잘레스와 프란시스코 올리베라스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새로운 선수인 곤잘레스, 디키 손, 엑토르 비야누에바의 공격력은 시즌 내내 팀을 이끌었다.[79] 팀의 불펜 또한 1.63의 리그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올리베라스, 그레그 해리스, 호세 레브론, 스콧 베일스가 이끌었다. 산투르세는 라운드 로빈에 진출하여 탈락 경기에서 마야구에스를 꺾은 후 2위를 차지했다. 팀은 챔피언십에서 승리하여 산후안을 상대로 5–1로 최종 시리즈에서 승리했다.[80] 캉그레헤로스는 LBPPR의 대부분의 상을 휩쓸었고, 올리베라스는 올해의 감독, 레브론은 올해의 투수, 곤잘레스는 리그 MVP를 수상하며 홈런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81] 산투르세는 40년 만에 첫 캐리비안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투수진과 손의 공격력을 기반으로 했으며, 비야누에바는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82] 1993–94 시즌, 곤잘레스, 시에라, 레오 고메즈가 포함된 캉그레헤로스는 정규 시즌 4위를 기록했다. 라운드 로빈을 8–4의 기록으로 마친 후 팀은 최종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산후안에게 5–2로 패했다.[83] 1994–95 시즌을 앞두고 캉그레헤로스는 곤잘레스와 올리베라스에 대한 권리를 바야몬의 전 프랜차이즈를 소유하게 된 카과스에 넘겨주었다. 팀은 시즌 내내 공격 부진을 겪으며 5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러한 경기력으로 인해 트로이 O'레어리, 칼 에버렛, 제럴드 윌리엄스 세 명의 보강 선수가 해고되었고, 외야진 전체가 바뀌었으며 시에라만이 제 몫을 해냈다. 손은 제한적인 출전 후 은퇴했다.[83]
1995–96 시즌, LBPPR은 라운드 로빈을 중단하고 이전 형식으로 돌아갔다. 호세 크루즈가 감독으로 영입되었고, 팀과 휴스턴 애스트로스 간에 느슨한 협약이 맺어지면서 애스트로스에서 몇몇 유망주를 임대했다. 호세 크루즈 주니어는 이 시즌에 데뷔했다. 레이 오르도네즈, 대릴 스트로베리, 멜빈 니에베스, 에두아르도 페레즈, 올랜도 메르세드가 로스터에 포함되었다. 산투르세는 정규 시즌 3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캉그레헤로스는 준결승에서 아레시보에게 패했다.[84] 1996–97 시즌 팀에는 맷 갈란테와 유망주 데니스 콜론, 제임스 마운튼, 크리스 홀트, 브라이언 헌터 등 애스트로스 출신 여러 인물들이 포함되었다.[85] 산투르세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산후안에게 모든 경기를 패했다. 이듬해 캉그레헤로스는 진출에 실패했고, 정규 시즌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86] 애스트로스 선수들의 존재가 이미 줄어들던 해에, 시에라는 여전히 탄탄한 공격력을 보여주었고, 스콧 엘라톤은 팀을 위해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86] 1999년 1월, 산후안의 프랜차이즈가 카롤리나로 이전되면서, 10년간의 마지막 "시티 챔피언십"이 개최되었다.[87] 산투르세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준결승에서 마야구에스에게 스윕을 당했다.[88]
6. 프랜차이즈 불안정 시기 (2000-2012)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는 2000년대 초반, 10년을 시작하며 12번째 LBPPR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89] 이 팀은 산토도밍고에서 무패로 열린 캐리비안 시리즈에서 우승했다.[89] 이는 캉그레헤로스의 다섯 번째 캐리비안 챔피언십이자, 그 10년 동안 푸에르토리코 팀이 획득한 유일한 타이틀이었다. 2004년에는 최근 몇 년간 관중 수가 크게 감소한 후, 캉그레헤로스는 호세 발렌틴에게 매각되었고, 그는 마나티로 팀을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산후안 시장의 승인을 받았지만 캉그레헤로스 팬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장은 2004-05 시즌에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의 이름을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로 변경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 새로운 캉그레헤로스는 이동했고 팀은 로보스 데 아레시보로 이름을 변경하여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에 야구팀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08년 5월, 팀이 2008-09 시즌에 다시 경기를 재개할 것이고, 아테니엔세스 데 마나티가 산투르세로 다시 옮겨 캉그레헤로스가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푸에르토리코 프로야구 리그의 구조 조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홍보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2008년 7월 15일, 리그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관계자들이 회의에 참여하여 리그의 상품화에 대한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90] 팀은 여전히 발렌틴이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이름을 바꾼 푸에르토리코 야구 리그에 참가한 산투르세는 4년 만의 복귀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2009년 11월, 발렌틴이 제안한 면제가 리그 이사회에서 수용되었고, 팀은 다음 시즌에 휴식에 들어갔다.[91] 이는 산후안 시 정부의 반대로 인해 팀이 홈 구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91] 2010년 8월, 리그는 캉그레헤로스뿐만 아니라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가 히람 비손 스타디움으로 복귀한다고 발표했다.[92] 그러나 다음 달, 산후안 시는 다시 두 팀의 경기장 참여를 반대했다. 리그 관계자들은 즉시 시 정부 관계자와 회의를 열어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93] 그들은 2010-11 LBPPR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94]
6. 1. 2000년대 초반의 성공과 위기 (2000-2004)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는 2000년에 LBPPR 챔피언십에서 12번째 우승을 차지했다.[89] 같은 해, 산토도밍고에서 열린 캐리비안 시리즈에서 무패로 우승하며 통산 5번째 캐리비안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는 그 10년 동안 푸에르토리코 팀이 획득한 유일한 캐리비안 시리즈 우승이었다.[89]2004년, 캉그레헤로스는 호세 발렌틴에게 매각되었고, 그는 팀을 마나티로 이전했다. 이는 산후안 시장의 승인을 받았지만, 캉그레헤로스 팬들 사이에서는 논란을 일으켰다.
6. 2. 프랜차이즈 소멸과 재창단 (2004-2012)
2004년, 최근 몇 년간 관중 수가 크게 감소한 후, 캉그레헤로스는 호세 발렌틴에게 매각되었고, 그는 마나티로 팀을 옮기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산후안 시장의 승인을 받았지만 캉그레헤로스 팬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89]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장은 2004-05 시즌에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의 이름을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로 변경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 새로운 캉그레헤로스는 이동했고 팀은 로보스 데 아레시보로 이름을 변경하여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에 야구팀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2008년 5월, 팀이 2008-09 시즌에 다시 경기를 재개할 것이고, 아테니엔세스 데 마나티가 산투르세로 다시 옮겨 캉그레헤로스가 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푸에르토리코 프로야구 리그의 구조 조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은 홍보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2008년 7월 15일, 리그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관계자들이 회의에 참여하여 리그의 상품화에 대한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90] 팀은 여전히 발렌틴이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이름을 바꾼 푸에르토리코 야구 리그에 참가한 산투르세는 4년 만의 복귀 시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첫 라운드에서 탈락했다. 2009년 11월, 발렌틴이 제안한 면제가 리그 이사회에서 수용되었고, 팀은 다음 시즌에 휴식에 들어갔다.[91] 이는 산후안 시 정부의 반대로 인해 팀이 홈 구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91] 2010년 8월, 리그는 캉그레헤로스뿐만 아니라 세나도레스 데 산후안가 히람 비손 스타디움으로 복귀한다고 발표했다.[92] 그러나 다음 달, 산후안 시는 다시 두 팀의 경기장 참여를 반대했다. 리그 관계자들은 즉시 시 정부 관계자와 회의를 열어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93] 그들은 2010-11 LBPPR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94]
7. 프랜차이즈 복귀와 새로운 성공 (2012-현재)
산투르세 팬들의 요구와 75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프로야구 리그는 2012-2013 시즌을 위해 이 프랜차이즈를 다시 활성화했다.
2014-15 시즌부터 팀은 푸에르토리코 리그(현재 LBPRC로 개명됨)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에두아르도 페레즈 감독 아래에서 2014-2015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라몬 바스케스 감독 하에 2015-2016 시즌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8-2019 시즌에는 마야구에스 인디오스를 꺾고 또 한 번의 챔피언십을 팀에 안겨주었다. 바스케스는 열성적인 캉그레헤로스 팬들과의 불화로 인해 우승 직후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가 우승 직후 즉시 사임했기 때문에, 팀은 카르멜로 마르티네스를 임시 감독으로 임명하여 2019년 파나마에서 열린 카리브 시리즈에서 팀을 이끌게 했다.
2019-2020 시즌을 위해 산투르세는 이 프랜차이즈의 전 선수이자 1999-2000 시즌 선수로 챔피언이었던 호세 발렌틴을 고용했다고 발표했다. 발렌틴은 캉그레헤로스를 정규 시즌 동안 최고의 기록(21-10)으로 이끌었고, 결승전에서 다시 마야구에스 인디오스와 맞붙었다. 산투르세는 시리즈에서 승리(4-1)하여 창단 80주년에 프랜차이즈 통산 1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에 재가입한 이후, 캉그레헤로스는 두 번의 연속 우승을 포함하여 4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백투백" 우승이다.
7. 1. 2010년대 후반의 영광 (2014-현재)
2012-2013 시즌부터 프로야구 리그는 산투르세 팬들의 요구와 75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를 다시 활성화했다. 2014-15 시즌부터 푸에르토리코 리그(LBPRC)에서 활동하며, 에두아르도 페레즈 감독 아래에서 2014-2015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라몬 바스케스 감독 하에 2015-2016 시즌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18-2019 시즌에는 마야구에스 인디오스를 꺾고 또 한 번의 챔피언십을 팀에 안겨주었다. 바스케스는 캉그레헤로스 팬들과의 불화로 인해 우승 직후 감독직을 사임했고, 팀은 카르멜로 마르티네스를 임시 감독으로 임명하여 2019년 파나마에서 열린 카리브 시리즈에서 팀을 이끌게 했다.2019-2020 시즌을 위해 캉그레헤로스 데 산투르세는 1999-2000 시즌 선수로 챔피언이었던 호세 발렌틴을 감독으로 영입했다. 발렌틴은 캉그레헤로스를 정규 시즌 동안 최고의 기록(21-10)으로 이끌었고, 결승전에서 다시 마야구에스 인디오스와 맞붙었다. 산투르세는 시리즈에서 승리(4-1)하여 창단 80주년에 프랜차이즈 통산 16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리그에 재가입한 이후, 캉그레헤로스는 두 번의 연속 우승을 포함하여 4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유일한 "백투백" 우승이다.
참조
[1]
웹사이트
Cangrejeros beached opposition in 1954-55 Puerto Rican winter league
https://baseballhall[...]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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